짧은생각

출애굽에서 보여주는 자유의 의미

이스라엘이 걸었던 출애굽의 여정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자유는 단순히 해방에 있지 않았다. 해방이란 차원도 상당히 중요한 이슈이지만 출애굽기는 역설적으로 ‘출애굽’에 방점이 찍히지 않는다.

출애굽은 그 목적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회복이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삶은 인간성이 말살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적인 자유를 보여준다. 그들이 억압된 이유는 인간이 마음대로 인간을 대할 수 있다는 세계관의 발로다.

요즘 유행하는 ‘오징어 게임’에서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다. 어떤 룰이 있지만 그것은 방치하는 것이다. 자유의 극대화인 방종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는. 456억은 타인을 짓밟은 잔혹한 자유의 상금이다. 마음껏 사람을 짓밟고 얻어낸 공로탑이다. 이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아니던가.

출애굽은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자유를 선물로 주어서 마음대로 행동하게 만드는게 아니다. 자유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그들은 마음껏 불평한다. 광야에서 말이다. 자유인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의 목적이다. 자유를 주어서 무엇을 이루게 하시는가? 그것이 출애굽의 목적이다.

출애굽은 시내산을 향한다. 시내산은 언약이 맺어지는 장소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남편과 아내’라는 혼인서약을 맺은 것이다(렘31:32). 그리고 주어지는 십계명은 아내와 남편 사이의 혼인서약이다. 구원을 통해서 주어지는 놀라운 관계설정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위한 조건이었다. 그 조건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남편의 자격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날개로 구원하였고 온 세계가 자신의 것이라고 자신을 자랑하신다(출19:3-4).

자유는 하나님과 관계안에서 온전해진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오히려 억압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현대의 알수없는 병은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이라고 말하였다. 한마디로 자유의 만끽이 부르는 자기의 착취다. 자유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으로 표현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왜? 신과의 관계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자기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자유다. <필경사 바틀비>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왜 안하는 것인가? 그것은 남편되신 하나님때문이다. 그에게 주어진 자유는 신과의 관계속에서 참된 인간성으로 거듭난다.
‘오징어게임’에서 마지막 승자 성기훈은 456억이 담긴 계좌에서 단돈 만원을 출금한다. 나머지 돈은 그대로 계좌에 남겨둔채. 456억은 자신의 돈이 아님을 자각한다. 다른 이들의 목숨값이었다.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 돈을 쓰지않음으로 드러난다. 십계명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하지 말아야할 일들이 기록된다.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 회복은 십계명안에 있다.

자유라는 차원에서 율법은 무엇인가? 자유인이 누려야할 권리이자 책임이다. 억압된 노예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으로 누리는 자유다. 노예든 자유인이든 적용되는 어떤 법이 있다. 노예는 억지로 주어지는 할당량이 있고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자유인은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지키는 것이다. 방종이 아니다. 방종은 타인과 자신을 억압한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이요 사랑이다. 이것을 기억할 때 율법은 온전히 지킬 힘이 된다. 왜?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드러낼 것인가? 잔인하게 탐욕을 쫓아 방종할 것인가? 신이 허락하신 구원안에서 자유를 누릴 것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다.